Book/책 읽고 남기기

[책] 살인자의 기억법 / 김영하 : 기억의 혼란

요쿠 2018. 1. 11.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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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김영하의 소설을 읽어보게 되었다.

알쓸신잡이라는 TV 프로그램을 통해 본 적은 있는데 작품을 읽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원래 국내 소설들을 잘 안 읽는 편인데 문득 궁금해졌다.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는 책이 중고 서점에 나와있길래 바로 구매했다.

구매를 해보고 놀란 것이 책이 일단 얇다. 장편 소설이라고 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얇은 책이다.

앉은 자리에서도 다 읽을 수 있을 만큼 얇아서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읽을 수 있었다.



(내용 포함, 스포 약간)




<살인자의 기억법>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연쇄살인마(김병수)의 이야기를 담아낸 책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죽여왔고 다른 사람과는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싸이코패스다. 그런 그에게는 딸이 있다.

살인을 그만두고 살아가던 어느 날, 딸이 곧 결혼할 남자가 생겼다며 한 남자를 데리고 온다.

그 남자가 자신의 딸을 죽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 김병수는 딸이 당하기 전에 먼저 그 남자를 죽여야만 한다고 결심하게 된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잘 읽힌다. 분량도 적고 작가의 간결한 문체가 돋보이는 책이라 더 그렇다.

분명히 깊은 몰입도를 주는 책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 읽자마자 드는 생각은... 별생각이 없었다.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정말 이대로 이렇게 끝나는 건가? 이렇게? 

계속 의미 없는 질문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책을 덮었다가 해설을 한번 더 읽었다가 앞부분을 조금씩 더 읽어보며 생각을 다듬었다. 그래도 확실하게 정리되지는 않는다. 참 난감한 책이다.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짓궃은 농담이다. 아니 몰래카메라다. 깜짝 놀랐지? 미안. 그냥 장난이었어.


- 살인자의 기억법 中 -



연쇄 살인마인 주인공의 이야기에 너무 푹 빠져서 읽어간 나 자신이 우스워 보였다. 스토리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가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옆으로 제쳐두었다.

결말까지 다 읽고 나서야 깨달았다.

결말 부분에서 강한 임팩트를 주는 소설들을 읽다 보면(특히 반전이 있는 책의 경우) '작가가 뒤통수를 때린 듯한 기분이 든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이 책은 뒤통수를 친다기보다는 작가가 내 볼을 사정없이 꼬집고는 도망가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악을 이해하고 싶어한다. 부질없는 바람. 악은 무지개 같은 것이다. 다가간 만큼 저만치 물러나 있다.


- 살인자의 기억법 中 - 



'기억력을 잃어가는 연쇄살인범'이라는 설정은 스토리의 매력이나 재미를 위한 장치일 뿐만 아니라 결말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을 다 뒤죽박죽 섞어버리는 역할을 한다.

결말을 읽고 나서는 내가 읽은 책의 내용들이 구겨지거나 서로 마구 뒤섞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혼란스럽기도 한데, 대신에 독자가 책의 내용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는 무엇을 위해서 자신이 하는 일과나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메모해두고 녹음해 두었던 걸까. 그리고 무엇을 위해 딸을 지키려고 한 남자를 죽일 마음을 먹었단 말인가.

다른 사람들을 해치던 포식자였던 그가 다 늙어서 알츠하이머에 걸려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몰라보는 꼴이라니.

나이가 들고 병에 드는 것은 그 어떤 인간에게도 똑같이 주어지는 형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 살인자의 기억법 中 -



책을 다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나 시간이 꽤 지나간 일을 떠올려보면 안개처럼 희미할 때도 있고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선명하게 보일 때도 있다.

어떤 기억이든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게 모두 진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실은 진실과 허구가 마구 뒤섞여 있거나 내가 지난 시절의 추억을 미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내가 만들어낸 망상에 불과한 것일까?

<살인자의 기억법>은 불분명함의 경계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을 잘 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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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한 문체로 독자들을 쉼 없이 결말을 향해 몰아가는 매력이 있는 책이다. 씁쓸한 유머도 잘 드러나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아주 재밌게 읽었다.

하지만 결말 부분이 다소 혼란스럽다.

결말을 아는 상태로 시간이 좀 지나서 다시 읽어보면 또 다른 내용과 느낌으로 다가올 것 같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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